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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뮤직서커스 다이애나

금맥을 찾는 것이 쉬울까? 작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이 쉬울까?   

낭만시대 천재 음악가들은 ‘비루투오조(virtuoso)’라고 칭송받았다. 비루투오조라는 말은 ‘덕(virtus)’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여기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비루토오조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자. 높은 자리에서 목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를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감히 따라할 수 없을 실력으로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사람인가? 여러분이 상상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오늘의 주인공 낭만시대 비루투오조 리스트(Franz Liszt)를 함께 살펴보자. 

그는 연주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예를 들어 그동안 정면배치가 관례였던 피아노를 옆으로 돌려 배치함으로써 청중들이 숨죽여 자신의 연주를 관찰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청각을 자극하는 연주뿐 아니라 그의 찰랑거리는 금발머리와 높은 콧대, 날카로운 턱선이 청중들의 시각적 요소까지 자극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덕분에 객석에 앉은 수많은 여성 관객들은 리스트의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로맨틱한 얼굴과 피아노 건반을 애무하는 듯한 강한 제스처에 도취된 상태가 되었는데, 이어지는 고난이도 연주로 완벽하게 귀 호강까지 시켜주었으니 청중들의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의 쇼팽이 피아노로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대가였다면 리스트는 인간이 칠 수 있을까 싶은 피아노 기술을 아무렇지 않게 선보이는 실력을 선보였다. 

 그의 공연장은 마치 아이돌 가수들이 화려한 춤기술을 선보이며 호흡의 흐트러짐 하나 없이 라이브 공연을 소화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본인의 화려한 피아노 테크닉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작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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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는 타고 날 때부터 손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가늘었기 때문에 넓은 음역대 음을 동시에 짚으면서도 정교하고 화려한 테크닉이 가능했다. 

이 천재 피아니스트는 30마디 동안 연속해서 이어지는 양손 옥타브, 6옥타브 거리에서 이뤄지는 화려한 애드립, 세 손으로 연주하는 느낌을 주는 ‘세 손 연주효과’등을 완벽하게 구사하여 청중들에게 경외감을 선사했다. 

또한 낭만시대의 이 완벽한 아이돌 음악가는 팬 서비스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청중들이 자신의 연주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악보를 보고도 치기 힘들다는 작품들을 완벽하게 외워서 연주를 했다. 

지금은 무대 위에 설 때 연주가들의 암보가 당연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당시 연주회에 모든 곡을 외워서 연주했던 것은 리스트가 최초였다. 

또한 이전에는 공공연주회에서 여러 명의 연주자들이 모여 순서를 정해 연주했다면, 리스트는 음악회 전체를 혼자 끌어가는 독주형태의 ‘리사이틀(Recital)’ 방식으로 독주공연을 했다. 

리스트는 리사이틀 현장에 토크콘서트를 융합하여 청중들과 함께 소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아이돌로서의 진가를 발휘했다. 

이 때문에 리사이틀이 끝나면 상류층 귀부인들이 체통을 잊고 무대에 난입하여 그가 피우던 시가 꽁초, 연주 도중 벗어던지던 장갑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리스트의 능력은 당대 음악 산업의 상업화에도 큰 기여를 한다. 산업혁명으로 중상층이 증가하면서 아마추어 연주가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악보 출판 사업 역시 성황을 이뤘다. 

작은 변화 통해 달라질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리스트의 신기술이 담아 있는 악보들은 소위 말하는 ‘소장용’으로 취급되어 인기상품으로 등극하며 당대 문화인들의 구매욕을 자극했다. 그런데 리스트의 화려한 행보 뒤에는 엄청난 노력이 뒤따랐다는 점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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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는 친구인 피에르 올프에게 썼던 편지에서 “나는 하루에 4~5시간 정도를 손가락 연습에 쓰고 있다네”라며 자신의 노력을 고백했는데, 이 뿐 아니라 피아노 뚜껑을 여는 각도, 리사이틀에서 진행할 대본 등을 미리 준비하고 실험하면서 엄청난 노력을 들여 공연을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특별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퍼스널 브랜딩(Personal branding) 시대에 리스트의 편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매일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그가 본인의 특장점인 ‘손가락 기술’ 연마에 대해 전략적으로 많은 비중의 시간을 투자했다는 점이다. 

영상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뛰어난 아마추어들의 실력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기 때문에, 이제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기만 해서는 더 이상 주목받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개념이라 해서 거창할 것은 없다. 오히려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개념들은 인정받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기존의 개념에 조금씩만 아이디어를 첨가하거나 여러 아이디어를 융합해서 새로운 효과를 줄 수 있는 ‘작은 변화’가 훨씬 효율적이다. 

리스트가 피아노 배치를 살짝 변형하고, 리사이틀 공연에 토크콘서트 형태를 도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가 익숙함을 느끼는 기존의 개념에서 작은 변화를 통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 

19C 미국에서 금맥을 찾아 대박을 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골드러시(Gold Rush)가 있었다면, 지금은 작은 아이디어로 대박을 창출할 수 있는 아이디어 러시(Idea Rush) 시대이다. 

금맥을 찾는 것이 쉬울까, 작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이 쉬울까?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다.

음악가 헨델 동상

[포스트21= 칼럼 뮤직서커스 다이애나] 서양 음악사에서 바로크시대(1600-1750)의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음악의 어머니라 일컬어지면서 영국에서 당대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음악가이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험난한 위기들을 극복하며 그 위치에 올랐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찍이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을 받았던 그였지만, 사실 헨델은 영국 출신이 아니었다.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음악적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독일 하노버 선제후의 궁정에서 궁정악장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헨델은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풍족해 보이는 영국으로 도망가서 정착한다.

 

그렇게 런던에 도착한 25세의 헨델은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아 이를 2주만에 완성하고 이는 영국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그 오페라가 바로 아리아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로 유명한 <리날도>이다.

 

특히 이 아리아는 우리나라에서 19994인조 록밴드 플라워의 히트곡 <눈물> 도입부에 삽입되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여기까지 그의 전략은 적중하는 듯 보였으나, 이후 헨델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영국의 앤 여왕(1665-1714)이 서거하고, 하필 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선제후가 영국의 왕 조지 1(George I)로 즉위하게 된다.

 

자신이 배신하고 떠났던 사람이 영국의 왕이 되었으니 헨델의 괘씸죄가 매우 컸겠지만, 32살의 헨델은 왕이 물놀이 올 때를 노려 미리 악단을 대기시켰다가 관현악곡 <수상음악>을 연주하는 기지를 발휘, 다시 조지 1세의 궁정악사로서 그 명성을 회복했다.

칼럼니스트 뮤직서커스 다이애나

세속적인 이야기와 춤곡이 가미된 오페라를 문화상품으로 탄생시켜 음악으로 돈을 번 최초의 음악가이자 사업가로 전성기를 누린다.

 

그렇게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헨델이었지만, 서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일명 서민 오페라라고도 불리우는 발라드 오페라가 적수로 등장하고, 본인도 건강이 악화되면서 오페라 사업에 위기를 맞는다.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파산하고, 수차례 살해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서민들의 세속적 생활과 정 반대되는 성경 내용을 극으로 담은 오라토리오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영어 오라토리오를 확립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때 작곡된 오라토리오 메시아2<할렐루야>의 코러스를 듣던 국왕 조지 2세는 감동하여 벌떡 일어났고, 그 이후로 음악회에서 기립박수의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 후 헨델의 백내장은 더 심해졌고, 결국 완전히 실명을 하였음에도 조수들의 도움으로 작품을 개정하며 음악가로서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그의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고,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고 실천에 옮겼던 그의 끈질김과 담대함이 지금의 헨델을 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실패를 많이 겪기도 한다. 그러나 한 번 잘 생각해보자. 그 실패는 나의 능력부족에서 기인했던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에 내가 포기해서 그런 것인가?

 

철학자인 니체와 가수 켈리 클락슨은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그걸 견디다가 죽지만 않으면 너는 매우 강해질거야.)”이라고 이야기했던가? 코로나발() 경제위기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자.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다는 절망감을 버리면 비로소 내가 가진 재능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각자의 재능을 찾아 다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어서 오길 희망한다. 헨델처럼 눈이 멀거나 살해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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